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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빗소리가 정수리를 때린다. 시기 이른 장마는 결국 그녀의 생일 날 까지 비를 쏟는다. 며칠 간 해를 보지 못한 머리는 누구 마음처럼 구불구불 말려들고 작은 해바라기는 속도 없이 파릇파릇 잎을 틔운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아침 일찍 네가 찾아와 갓 난 크고 귀여운 해바라기를 두고 갔는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 너는 알고는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

계곡에 사는 모두는 시기가 되면 결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메리아에 대해선 단정 짓기 어려웠다. 그녀가 보인 미소 섞인 말들은 모두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다. 헤일리는, 아니 모두는 그녀가 한 사람 만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과연 그녀가 어디까지 진심인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정도로 나를, 우리를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몹시 화가 났지만 분노는 불안으로 금세 가려졌다. 메리아는 누구를 선택할까. 누가 버려질까. 적어도 나는 아니겠지. 어쩌면 나일수도.

 

좋은 일이 있길 바라네, 아가씨.”

어쩐지 투명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뒤로 한 채 급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정오가 지나긴 했지만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겠지. 비가 오는 날 너는 항상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았으니까.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켜 보아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비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진다.

루이스의 편지를 받고 나서도 메리아는 자신이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감정과 상관없이 분명 역겨운 일은 하고 있으니 꿈조차 꿀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오늘 비가 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계획적인 행동은 아니다.

차가운 빗물이 온 몸을 적셔 혈관 저 끝까지 몸이 차갑게 달아오른다. 추위에 입술과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지만 몸 어딘가는 미친 듯이 들끓고 있다. 감정적이라거나 충독적이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지만 지금 이 상황을 그 외에 어떤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오후 한 시, 에밀리가 점심을 권했지만 몸도 마음도 찌뿌둥해 거절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이 나의 어디가 모자란 걸까, 싶다가도 나의 어디가 당신과 어울릴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헤일리의 방에는 인화한 사진들이 꽤 많지만 메리아와 찍은 사진은 전혀 인화하지 않았다. 메리아를 사진 인화실로 부른 그 날 이후로 인화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되어버린 탓이다. 자신이 버려질 것이라는 생각에 치가 떨리고 억울함이 치솟았다. 이렇게 답답하고 괴로운데 너는 어디에 있는 걸까. 당장이라도 찾으러 나가고 싶은 마음이 목 끝을 찌르지만 침을 삼켜가며 꾹꾹 눌러 담는다.

이렇게 까지 굴욕적일 수는 없을 거야.’

 

벌컥, 다급한 문소리가 빗소리를 잠시 막는다.

세상에, 그게 무슨 꼴이야? 완전히 젖었잖아?”

미안해, 에밀리. 내가 다 치울게. 잠시만.”

 

헤일리, 나야. 조금 늦었지?”……메리아, 무슨 짓이야!”

날카로운 헤일리의 말에 조금 당황한 메리아는 엉거주춤 문 앞에 자리 잡는다. 헤일리는 화가 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비참한 표정으로 메리아를 노려보며 소리친다.

더러워, 내 방에 들어오지 마!”, 미안. 닦고 들어갈게. 혹시 수건 빌릴 수 있을까?”

옷이 아니라 너 말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메리아! 또 왜 날 괴롭히러 왔어!”

곧 눈물이 터질 것 같지만 결코 젖지 않는 헤일리의 빨갛고 건조한 눈가를 본 메리아는 놀라 헤일리에게 달려간다. 무슨 일이지, 이 밝고 자기 밖에 모르는 아이가. 빗물에 절어 축축하다 바다 짠 내 까지 나는 몸으로 헤일리를 와락 끌어안는다. 내칠 것처럼 격하게 날아오는 헤일리의 손은 아주 강하게 메리아를 끌어안는다.

무슨 일이야 헤일리, 왜 그래. 내가 잘못했어 진심이야. 미안해.”

또 뭘 하다 와서 몸이 이 모양이야, 진짜 짜증나!”

서로의 심장 소리가 가라앉아 빗소리가 들릴 때 까지 아주 세게, 따뜻하게 안고 있었다.

 

이제 진정이 됐어, 헤일리? 에밀리도 없으니 이제 본론을 말하고 싶은데.”

본론이라면, 해바라기?”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좋을 수도 있는 거.”

인어의 팬던트. 루이스의 소개로 알게 된 이 마을의 정식 프로포즈 전통. 코트 안주머니에서 팬던트를 꺼내자 이게 뭘까, 하고 쳐다보던 헤일리의 눈이 점점 켜졌다.

메리아, 이건?”

글쎄, 뭔 거 같아?”

세상에, 이걸 어디서 구했어. 아니. 잠시만, 이걸 나한테?”

헤일리의 입이 벌어지더니 금세 눈물이 흐른다. 조금 당황한 메리아는 헤일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살짝 웃어보인다.

충격이네. 그렇게 놀랄 일이야?”

이걸, 이걸 왜 나한테 준 건지 잘 모르겠어 메리아,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정말 미안했어 헤일리. 이미 알고 있겠지만 들어줘. 나 정말 많은 실수를 했어. 너와 사람들의 마음을 기만하고 희롱했어. 네가 날 믿어준다면, 나 달라질게. 헤일리, 정말 미안해.”

헤일리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이 부족함 없는 나의 어디가 당신과 어울릴 수 있을까. 당신은 결코 날 선택하지 않겠지, 해바라기만 남긴 채 버려지겠지. 영원의 약속,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 상대가 당신이기에.

난 정말 이해가……, 아냐 메리아, 사랑해. 정말 사랑해.”

나도 헤일리. 정말 사랑해.”

말랐던 눈가에 장맛비처럼 눈물이 흐른다. 메리아, 헤일리의 눈에 입 맞춘다.

 

헤일리, 대답해줘. 우쥬메리아?”

빨간 빛과 노란 빛이 뒤엉키며 또 다른 색의 무언가를 그려낸다.

푸핫, 그게 뭐야 정말!”

아마 앞으로도 두 사람이 그려낼 색을.

 

Happy birthday Ha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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